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중 공방전 (문단 편집) == 결과 == 결국 조조가 후퇴를 결정함으로서 한중은 유비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로써 한중공방전은 유비의 대승으로 끝맺어졌다. 이 승리는 단지 유비의 촉이 한중 지역을 먹었다는 것 외에도 유비에게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첫째로는 '''진영 대 진영'''으로, 그리고 '''정규군 대 정규군'''으로 유비가 조조를 압승한 것. 이는 여러 제후의 휘하나 떠돌아다니던 유비가 촉이라는 기반을 통해 성장해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후가 되는 데 성공했고, 그 천하의 조조를 상대로 한중공방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신생 유비군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이런 촉의 기세는 이후 [[형주 공방전]] 때까지도 하늘을 찌르고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났다. 또한 이 승리는 기습이나 복병, 타 세력과의 협력을 통한 것도 아닌 유비 세력 정규군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한중공방전을 통해 유비는 제후로서 세력 안정화에도 성공했다. 이전까지는 유비나 제갈량을 포함해 극히 일부가 핵심적인 업무를 다 떠맡아야 하는 방식으로, 떠돌이 생활을 할 때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유비가 한 지역의 제후로 자리를 잡으면서 처리해야 할 일의 양이 폭증하자 그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한중전에서 후술하는 대로 역할을 상세하게 나누고 일부 실패가 있었다지만 대부분 이 역할 수행을 제대로 해내면서 역할분담이 깔끔히 처리되었다. 게다가 승전 이후 유비는 219년 7월, [[한중왕표|한중왕을 자칭하기에 이른다.]] 조조가 일자왕인 '''위왕'''을 자칭한 것에 비해 이자왕인 한중왕은 격이 낮아 보일 수 있지만 유비가 계한-한나라를 계승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과 '''그 유방과 같이''' 한중에서 왕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유비는 자신이 추구하는 명분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심지어 이는 위나라가 한나라를 무시하고 짓밟으려는 것과 대비되어 더욱 더 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유씨도 아닌 조조가 왕위에 오른지 고작 2년, 위 왕실이 살얼음판 위에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바로 이때, 조조가 자신의 영토였던 한중에서 유비와 싸워 최측근인 하후연을 잃고 땅을 무력하게 빼앗겨 유비가 보란듯이 '위왕'으로부터 빼앗은 그 땅의 왕에 오른다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당시 여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한중은 [[고제(전한)|한고제]] 유방이 한왕으로 등극한 지역이며, 이는 곧 한 제국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유비는 '한 황실의 종친으로서 시조인 유방처럼 [[항우]]와 같은 역적 [[조조]]를 토벌하고 한중에서 다시 한나라를 세울 것'이라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한 황실을 사실상 거머쥔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도 사방에서 반대와 반란이 일어나 속을 썩였는데, 유비는 한 황실 부흥이란 명분을 들이밀면서 한중왕을 칭하고도 별 탈이 없었다. 이런 대조에 조조가 느꼈을 씁쓸함, 그리고 유비의 칭왕에 고무되어 들고일어날 수많은 반란에 대한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다만 반 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형주 공방전]][* 전쟁 시작은 반 년은커녕 한중 공방전 직후에 벌어졌고, 관우가 전사한 게 한중 공방전이 끝난 5월에서 7개월 후인 12월이다.]에서 관우가 오나라 측의 기습으로 전사하고 이에 유비가 복수의 명목으로 무리하게 [[이릉대전]]을 일으켰다 대패하는 바람에, 하늘을 찌를 듯했던 촉한의 기세는 1년도 못 가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히고 만다.[* 만약 형주공방전이 조금만 다르게 흘러갔다면 기세와 명분 양면에서 크게 유리했던 만큼 일이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실제로 형주공방전 당시 관우의 공격에 호응해 일어난 반란들, 그리고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촉한에 호응해 항복했던 천수군의 일부 지역들([[강유]] 포함)을 보면 유비측에 얼마나 민심이 쏠려있는지 볼 수 있다. 전반적인 세력은 유비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열세였지만, 위 측 내부의 불만세력들이 호응한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노릇이다. 형주의 관우, 한중에서 유비가 북진하는데 반란까지 일어나면 정말 막기가 힘들고, 이는 실제 형주공방전 초반에 관우의 무서운 공세로 명백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런만큼 이 당시 오나라의 동맹 파기와 이에 따른 패배, 뒤이은 이릉대전의 대패는 촉한 입장에선 뼈아픈 타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